스포츠는 개혁과 진보를 상징한다. 미국 메이저리그 최초로 인종차별의 벽을 허문 건 1948년 LA 다저스에 입단한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이었다. 냉전종식을 전세계에 알린 건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극단적인 보수정치(쇄국정책)로 각인된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은, 사실 조선 500년 사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인 개혁정치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집권하기 무섭게 안동 김 씨 세도정치를 일소하고, 수백년동안 전국에 수 천 개 이상 난립해 각종 면세 혜택을 누리며 국가 재정을 파탄냈던 서원을 단칼에 철폐했다. 급기야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하는, 그야말로 건국이래 가장 ‘파격적인’ 개혁정치들을 단행했다.

현량과(賢良科) 실시,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 급진적 개혁정치를 펼치다 훈구파(보수)의 역공으로 희생(기묘사화, 1519)된 것으로 묘사돼왔던 조광조는 원조 보수주의자였다.

조광조가 현량과 실시,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을 통해 지향한 사회는 철저히 성리학적 이념으로 유지되는 사회였다. 그는 사회 곳곳에 성리학적 이념과 가치를 깊숙이 뿌리내리려 했던 최초의 정치인이자 학자였다.

따지고 보면 흥선대원군과 조광조가 펼친 파격적인 개혁정치는 모두 보수정치의 복원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보수 개혁정치’의 복원을 꾀했던 흥선대원군과 조광조는 모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했고, 조광조는 ‘보수’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려던 기득권층의 반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와 같이 보수정치는 ‘개혁’이라는 양분을 먹고 산다. 반대로 개혁과 진보는 ‘보수’라는 엔진이 있어야만 달릴 수 있다. 지금 한국의 보수세력엔 개혁을 말하려는 이조차 없는 듯 하다. 개혁을 ‘보수의 적(敵)’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정치의 복원을 위해 치밀하고 처절한 개혁을 단행했던 흥선대원군과 조광조마저 실패했는데, 하물며 개혁을 ‘보수의 적(敵)’이라 여기는 한국의 보수정치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작금의 보수정치가 개혁정치의 엔진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개혁과 진보로 상징되는 스포츠를 파괴하려는 적들이 도처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들은 스포츠를 통해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려는 세력이다. 최근 다시 스포츠의 본질적 이념과 가치에 반하는 승부조작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스포츠는 왜 존재하는가. 스포츠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개혁’이라는 양분과 ‘보수’라는 엔진을 모두 잃어버린 스포츠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막막하다.

박지훈 변호사(법무법인 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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