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전을 앞두고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는 장정석 감독(사진=엠스플뉴스)
개막전을 앞두고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는 장정석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부산]

특정 투수 상대로 극단적인 약점을 보이는 스타 플레이어가 있다. 결과가 안 좋아도 선수의 자존심을 생각해 계속 상대하게 두는 게 나을까, 아니면 천적관계를 피해가는 게 나을까.

풀타임 1군 선수가 된 이래 쭉 4번타자로만 출전한 선수가 있다. 그런데 통계는 이 선수를 4번이 아닌 2번, 3번으로 기용해야 팀 득점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4번타자의 상징성과 자존심을 생각해 계속 4번타자로만 기용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팀을 위해 타순을 조정하는 편이 바람직할까.

키움 히어로즈 장정석 감독은 ‘자존심’과 ‘팀 승리’ 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 3월 23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 상대 개막전. 이날 장 감독은 부동의 톱타자이자 간판스타 이정후를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했다. 롯데 개막전 선발투수 브룩스 레일리 때문이다.

이정후는 지난 2년간 레일리 상대로 유난히 약했다. 2시즌 통산 상대전적 15타수 무안타. 무안타도 무안타지만, 배트 중심에 제대로 맞힌 정타가 거의 나오질 않았다. 이정후도 “레일리만 만나면 이상하게 공이 잘 안 보인다"고 하소연했다.

좌타자가 좌투수 상대로 약한 것과는 다르다. 이정후의 지난해 좌완 상대 타율은 0.370으로 우완 상대(0.350)보다 오히려 좋았다. 레일리가 좌완이라 약한 게 아니라, 상대가 레일리라서 약했다고 봐야 한다. 좌투수를 상대할 기회가 적다보니 ‘낯설게’ 느끼는 것과도 차이가 있다. 그보단 ‘상대성’의 문제에 가깝다.

장 감독은 이정후 대신 서건창을 톱타자로 배치했다. 서건창은 좌타자임에도 비교적 레일리 공을 잘 공략해온 타자다. 통산 상대전적 24타수 7안타. 최근 2시즌은 19타수 6안타로 나쁘지 않은 기록을 냈다.

또 키움은 김하성을 2번으로, 붙박이 4번타자 박병호를 3번으로 전진 배치했다. 박병호는 이날이 LG 시절인 2009년 이후 10년 만의 3번 타자 출전. 대신 외국인 타자 제리 샌즈가 4번 타자로 나섰고, 우타 거포 장영석이 5번에 배치됐다. 지난해 좌타자(피안타율 0.172)에는 강했지만 우타자(0.306) 상대론 재미를 못 봤던 레일리를 겨냥해 우타자 4명을 상위 타선에 포진했다.

키움의 타순 변동은 적중했다. 1회부터 주자 두 명이 출루하고, 공 20개를 던지게 하며 레일리의 진땀을 쏙 뺐다.

3회엔 선취점도 뽑아냈다. 선두타자 서건창이 좌전안타로 포문을 열고, 김하성이 9구 승부 끝에 좌전안타를 때려냈다. 이어 좌익수 전준우의 실책을 틈타 한 베이스씩 이동해 주자 2, 3루. 여기서 박병호가 2구째를 공략해 또 좌익수 앞으로 타구를 보냈다. 세 타자 연속 좌전안타로 2점을 먼저 얻은 키움이다. 키움은 이어진 찬스에서 임병욱의 내야안타로 1점을 더해 3대 0 리드를 잡았다.

키움 상위타선은 3대 1로 앞선 5회초 다시 터졌다. 선두 김하성이 레일리의 바깥쪽 높은 체인지업을 당겨 좌측 담장을 넘겼다. 이어 박병호가 5구째 바깥쪽 높은 투심을 받아 때려 우측 담장 너머로 날려 보냈다. 백투백 홈런으로 점수는 5대 1. 좌타자들이 악몽으로 여기는 레일리의 역회전 공을 손쉽게 홈런으로 만든 키움 타선이다.

벤치에서 대기하던 이정후는 5회초 레일리가 물러난 뒤 경기장에 발을 들였다. 5회초 첫 타석에선 2루수 땅볼 아웃. 그러나 7회초 이정후의 진가가 발휘됐다. 5대 4로 쫓긴 1사 2루에서, 좌완 고효준 상대로 유격수 옆을 빠져나가는 중전 안타를 때려내 달아나는 타점을 올렸다. 좌타자임에도 좌완 상대로 강한 이정후다운 타격이 나왔다.

자존심보다는 팀을 우선하는 키움의 야구는 마운드 운용에서도 돋보였다. 선발 제이크 브리검은 5이닝 동안 투구수 86개를 던지며 4실점(3자책)한 뒤 이날 피칭을 마쳤다. 투구수로 봐선 1, 2이닝 더 끌고갈 수도 있었지만, 5회 들어 공이 맞아나가기 시작하자 과감한 교체를 택했다. 장 감독은 경기 전 “올 시즌 브리검, 최원태, 안우진은 투구수는 물론 이닝도 관리할 것”이라 이야기한 바 있다.

5대 4로 앞선 6회엔 김상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김상수는 지난 시즌 팀의 마무리 투수였고, 올 시즌 주장을 맡은 선수다. 하지만 장 감독은 김상수가 아닌 조상우를 마무리로 낙점했다. 김상수는 6회부터 8회 사이 상황에 따라 기용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실제 이날 한 점차로 앞선 6회가 되자 바로 마운드에 올렸고, 김상수는 1이닝 무실점으로 제몫을 다했다.

7회엔 한현희가 등판했다. 지난 시즌 선발투수로 두 자리 승수를 거둔 한현희다. 팀내 선발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이닝을 책임지며 이닝이터 능력도 증명했다. 하지만 키움은 시즌 전 한현희와 면담을 통해 불펜으로 보직 이동을 결정했다. 장 감독은 “한현희가 불펜으로 이동하면서 뒷문이 더욱 탄탄해질 것을 기대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역시 개인보단 팀을 위한 선택이다.

키움은 초반 레일리 공략 성공과 후반에 터진 이정후의 적시타, 4이닝을 잘게 쪼개 막아낸 불펜 호투에 힘입어 롯데를 7대 4로 꺾고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장 감독은 앞으로도 레일리가 등판하는 날엔 이정후를 선발 라인업에서 뺄 계획이다. 키움 관계자는 “레일리와 만나는 건 일년에 많아야 4, 5경기다. 약점이 뚜렷한데 굳이 상대하게 할 이유가 없다. 선수 개인 성적에도 도움이 되고, 팀 승리 확률도 높일 수 있는 길”이라 했다. 레일리에 약한 이정후를 고집하기보단, 상대적으로 강점이 있는 타자들을 기용해 최상의 라인업을 짜는 게 합리적이란 설명이다.

박병호의 타순도 4번만 고집하지 않고 3번, 2번 등 변화를 줄 예정이다. 이미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박병호와 면담을 통해 충분한 설명을 했고, 양해를 구한 결정이다. 자존심, 상징성, 전통과 같은 ‘불합리’한 가치보다는 팀 승리를 위해 가장 도움이 되는 전략을 선택하는 키움의 ‘합리주의’ 야구. 일단 시즌 개막 첫날은 성공을 거뒀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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