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 롤모델 이치로의 은퇴 경기에 보낸 리스펙트 “말로 표현 못 할 묘한 감정”

-이치로 타격 영상 보며 야구선수 꿈꿔…“먼 훗날, 이치로처럼 멋진 마무리 꿈꿔요”

-‘천적’ 레일리 상대 개막 선발 라인업 제외 “감독님 결정 100% 지지한다”

-“개막전 출전만으로도 감개무량, 팀 승리 위해 최선 다할 것”

키움 히어로즈 이정후는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됐지만 “출전만으로도 감개가 무량하다“고 했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키움 히어로즈 이정후는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됐지만 “출전만으로도 감개가 무량하다“고 했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엠스플뉴스]

레전드 스즈키 이치로가 떠났다. 이치로는 3월 21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개막경기에서 만 45세 150일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쳤다.

감동적인 은퇴 경기였다. 8회말 교체돼 더그아웃으로 향할 때 이치로의 깊어진 주름과 하얀 머리는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 이치로가 붉어진 눈시울로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동료들과 포옹을 나눌 때 지켜보는 팬들의 눈가도 함께 촉촉해졌다. 같은 날 빅리그 데뷔전을 치른 기쿠치 유세이가 이치로와 포옹을 나눈 뒤 눈물을 흘릴 때는, 팬들도 함께 울었다. 이치로의 은퇴는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찡한 감동을 선사했다.

KBO리그 선수들에게도 이치로의 은퇴는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키움 히어로즈의 톱타자 이정후도 이치로 은퇴경기를 인상깊게 지켜본 선수 중에 하나다.

이정후가 아버지 은퇴식보다 이치로 은퇴식에 더 크게 공감한 이유

개막전이 열린 23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만난 이정후는 이치로 선수가 올 시즌에도 야구를 계속할줄 알았다은퇴경기를 보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이치로는 이정후가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줄곧 롤모델로 삼았던 선수다. 이정후는 “초등학교 3학년 나이에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 아버지(이종범 LG 코치)가 ‘왼손타자가 되라’는 조언을 해주셨다”며 “야구 시작한 뒤 처음 접한 타격영상이 이치로의 영상이었다. 자연스럽게 제 롤모델이 됐고, 매일 이치로 타격영상을 보며 연습했다”고 했다.

“국적을 떠나서 이치로 선수가 야구를 대하는 태도라든지, 경기를 준비하는 자세를 봤을 때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선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야구하면서 늘 이치로를 롤모델로 삼았어요. 올해 미국 캠프에서 같은 훈련장(피오리아 스포츠 컴플렉스)을 사용했거든요.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을 봤는데, 다른 선수들과는 아우라가 다르더라구요.” 이정후의 말이다.

실제 이치로는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을 마치 수도승처럼 야구에 투자하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이치로는 언제나 경기 시작 5시간전 경기장에 도착해 같은 방식으로 스트레칭과 타격 연습을 했고, 매일 같은 메뉴로 아침과 점심을 먹었다. 비시즌에도 특수 기구를 사용해 매일 세 번씩 운동했다. 만 38세였던 2012년에도 체지방 비율이 6%일 정도로 ‘자기관리의 화신’과 같았던 이치로다.

이정후는 개인 SNS를 통해 이치로에 보내는 ‘리스펙트’의 메시지도 남겼다. 솔직히 아버지 은퇴식 때는 제가 어렸고, 야구선수를 꿈꾸는 아마추어 선수였어요. 또 아버지도 은퇴한 뒤 한참 지나서 은퇴식을 가졌기 때문에, 크게 와닿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프로 선수가 돼서 그런지, 이치로 선수 은퇴가 좀 더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아요. 이정후의 솔직한 고백이다.

“레일리 상대 라인업 제외? 제가 안 나가야, 오늘처럼 팀이 이기죠”

개인 SNS를 통해 이치로에 대한 리스펙트를 전한 이정후(사진=SNS 캡쳐)
개인 SNS를 통해 이치로에 대한 리스펙트를 전한 이정후(사진=SNS 캡쳐)

이정후도 언젠가 먼 훗날 이치로처럼 큰 선수가 되길 꿈꾼다. 이치로처럼 많은 이의 박수를 받으며 멋지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정후는 제가 아직 어리지만, 언젠가 나중에 은퇴하게 된다면 이치로 선수처럼 멋있게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이정후가 프로 무대에서 보여준 잠재력을 볼 때,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실력뿐만 아니라 야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큰 선수의 자질을 보여주는 이정후다. 이날 롯데 자이언츠 상대 개막전만 봐도 이정후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야구를 하는지 잘 드러난다.

이날 이정후는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 들지 못했다. 장정석 감독은 “이정후가 롯데 선발 브룩스 레일리 상대로 약하다”며 “일단 뒤에서 대기하게 한 뒤, 나중에 교체 투입할 것이다. 레일리 나오는 경기엔 이정후는 선발 출전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데뷔 시즌 전경기(144경기)에 출전해 0.324 타율로 신인왕을 차지하고, 2년차 시즌 타율 0.355로 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국가대표와 골든글러브를 거머쥔 이정후다. 단 두 시즌 만에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런 선수를 특정 투수에게 약하단 이유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이정후는 팀이 이기는 게 중요하지 제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며 장정석 감독의 선택을 100% 지지한다고 밝혔다.

“레일리도 제가 자길 상대로 약하다는 걸 분명 알 겁니다. 만약 제가 선발 출전하면, 레일리 입장에선 ‘저 타자는 내 공을 못 친다’는 생각에 더 자신있게 던질 수 있어요. 저도 위축될 수가 있구요. 하지만 제가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면, 저보다 레일리 상대로 강한 선수가 나가서 상대할 수 있잖아요. 전 감독님 결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이날 키움은 이정후 대신 레일리 상대로 통산 24타수 7안타를 기록한 서건창을 선발 톱타자로 기용했다. 이어 2번 김하성, 3번 박병호, 4번 제리 샌즈, 5번 장영석까지 오른손 타자로 상위 타순을 채웠다. 키움은 3회 터진 박병호의 2타점 적시타로 선취점을 낸 뒤, 5회 김하성과 박병호의 백투백 홈런으로 레일리를 무너뜨렸다.

이정후는 레일리가 물러난 5회 교체 출전해 5대 4로 앞선 7회 달아나는 적시타를 때렸다. 상대는 레일리와 같은 좌완투수 고효준이었다. 경기는 키움의 7대 4 승리로 끝났다.

제가 안 나가야, 우리 팀이 오늘같이 이기죠. 경기가 끝난 뒤 이정후가 싱긋 웃으며 들려준 얘기다.

이정후 “개막전 못 나갈 줄 알았는데…출전만으로도 감개무량”

먼 훗날 이치로 같은 선수를 꿈꾸는 이정후(사진=키움, 게티이미지코리아)
먼 훗날 이치로 같은 선수를 꿈꾸는 이정후(사진=키움, 게티이미지코리아)

이정후의 ‘레일리 피해가기’는 이날 즉흥적으로 이뤄진 결정이 아니다. 이미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때 장정석 감독과 이정후의 개인 면담을 통해 충분한 설명을 했고, 납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정후는 “제가 지난 2년간 레일리 상대로 안 좋았고(15타수 무안타 타율 0.000), 올 시즌을 앞두고 어깨 수술을 했다는 점을 배려해 주셨다”고 했다. 감독님 말씀이 어차피 한 시즌을 치르다 보면 휴식일이 필요한데, 레일리 나오는 날을 휴식일로 생각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봐야 두 세 경기인데, 오늘처럼 휴식일로 하고 뒤에 대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정석 감독은 이정후에게 단순 레일리 상대전적만이 아니라, 레일리를 상대한 이후의 성적을 근거로 설명했다. “계속 상대하다 보면 언젠가 안타를 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감독님은 레일리만이 아닌 레일리와 상대한 다음날 성적을 말씀하셨어요.” 이정후의 말이다.

제가 레일리와 상대하고 나면 타격 밸런스가 크게 무너지곤 했거든요. 당장 한 경기만이 아니라 두세 경기, 10경기를 봤을 때 레일리보다는 그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게 더 좋은 컨디션으로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는 길이란 설명을 들었습니다. 레일리 한번 깨보겠다고 밸런스가 망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저도 충분히 수긍하는 부분입니다.

팀 승리를 위해 가장 합리적이고 확률 높은 길을 택하는 게 키움 야구의 강점이다. 그러면서도 선수 개개인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른 팀의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선수 기용을 하면서도 잡음이 생기지 않는 비결이다. 이정후는 “우리 팀은 워낙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다”며 “전 감독님이 기용해 주시면 열심히 뛸 뿐”이라 했다.

사실 어깨 수술 때문에 오프시즌 기간에는 ‘개막전 출전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교체 출전이나마 개막전에 출전하고, 안타도 치고, 팀도 이겼잖아요. 감개가 무량합니다. 기분이 정말 좋아요. 오늘 프리배팅 치면서 감도 잡았습니다. 올해 팀이 좋은 성적 거둘 수 있게 열심히 해야죠.먼 훗날 이치로처럼 멋진 마지막을 꿈꾸며, 오늘도 이정후는 달린다. 이치로의 야구는 끝났지만, 이정후의 야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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